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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권 5장 (1) 요약페르낭 브로델물질문명과 자본주의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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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권 교환의 세계

제5장 사회 혹은 “전체집합”

 에밀 뒤르켐(1896)과 함께 사회학이 등장한 것은 사회과학 전체에서 일종의 코페르니쿠스적인, 또는 갈릴레이적인 혁명이었으며 패러다임의 변화로서, 그 영향이 오늘날까지 미치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당시에 앙리 베르는 이것이 수년간에 걸친 답답한 실증주의의 유행 뒤에 “일반적인 사고”로 되돌아가는 것으로서 환영해마지 않았다. 그러나 사회학은 지나치게 일반적인 사고에 매달려 있고 역사적인 감각이 가장 모자라는 것으로 보인다. 역사 경제학이라는 것은 있어도 역사 사회학이라는 것은 없다. 경제학은 어떤 방식으로든 과학인 반면에 사회학은 자신의 목표를 잘 정의하지 못하고 있다. 조르주 귀르비치는 역사가들을 완전히 만족시키지는 못하지만 “전체사회”라는 것을 통해 비록 깨지지 쉬운 것이지만 사회적인 것에 대해 일반적인 포괄을 시도했다. 구체성을 중시하는 역사가들이 보기에 전체사회는 서로 연결되어 있든 아니든 살아 있는 여러 현실들의 종합이어야 한다. 이런 뜻에서 사회를 “전체집합”이라고 표현하고자 한다. 전체집합이라는 용어는 우리가 관찰하는 모든 사회적 현실이 그보다 더 상위의 집합 속에 위치한다는 점 그리고 변수들의 묶음으로서 이 집합보다 더 큰 다른 변수들의 묶음이 존재한다는 점을 환기시켜주지 않는가?

 물론 이와 같은 총체성은 실제로는 더 한정된 그리고 더 용이하게 관찰할 수 있는 여러 집합들로 세분된다. 슘페터는 “연구자는 분류를 하는 그의 손으로 사회의 [단일한] 거대한 흐름으로부터 경제적인 사실들을 인위적으로 구분한다”고 이야기한다. 트리벨리언은 그의 저작인 「영국 사회사」를 쓰면서 이것은 “정치를 배제해버린 민중의 역사”를 의미한다고 했다. 이때의 구분이란 무엇보다도 인위적인 것이다. 맑스의 상부구조와 하부구조 구분도 그렇고, 앞에서 핵심적인 설명들을 개진하는 데 사용한 삼분법도 그렇다. 이것은 단지 설명 방식을 뿐이며 그 목적은 중요한 문제들을 효율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것일 따름이다.

 근대의 사회과학(사회학과 역사학)은 원칙적으로 일반화를 지향하면서도 많은 전문 영역들로 세분된다 : 노동사회학, 경제사회학, 인식정치학, 정치사, 경제사, 사회사, 예술사, 이념사, 과학사, 기술사 등. 그러나므로 사회라고 하는 커다란 집합 속에 다시 여러 다양하고 잘 알려진 집합들을 구별하는 것은 평범한 구분이다. 이런 분류 속에서 전체사(내지는 전체화하려는 역사, 즉 전체적이 되려고 하고 그렇게 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결코 완전하게 그렇게 되지는 못하는 역사)라고 하면 적어도 네 개의 “체제들”을 연구하고 또 그 체제들 사이의 관계, 상호성, 중복을 연구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하나의 평면 위에서 하나의 움직임으로 보여준다는 것은 실현불가능한 이상일 뿐이다. 다만 실제로는 구분하되 마음속으로는 전체화하는 시각을 간직하라고 권할 수 있을 뿐이다. 그와 같은 것을 설명해나가는 가운데 여기저기에서 드러나게 되고, 통합성을 재창조하며, 사회를 단순하게 파악하는 잘못을 막아주고, 신분사회, 계급사회, 소비사회 등 흔히 사용하는 여러 양식들에 대해서 그것들이 의미하는 바를 사회에 전체적으로 생각해보지도 않은 채 사용하는 것을 막아준다. 예컨대 상인=부르주아, 상인=자본가, 귀족=지주 등의 편리한 등식을 믿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부르주아지나 귀족과 같은 것이 아주 잘 한정되어 있는 집합으로서 구분선이 명백한 카테고리나 계급인 것처럼 이야기해서도 안 된다. 더구나 어떤 영역은 다른 한 영역보다, 또는 다른 모든 영역보다 언제나 우위에 있다고 선험적으로 상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여러 영역들, 집단들, 집합들은 전체 사회 내부에서 어느 정도 긴밀하게 서로 묶여 있어서 결코 완전히 자유롭게 내버려두는 일이 없으며, 이들 사이에 유동적인 계서제를 이루는 가운데 끊임없이 상호관계를 맺고 있다.

 다른 지역보다 사정을 잘 알 수 있는 유럽을 보자. 세계의 다른 곳보다 앞서 있는 유럽에서 11~12세기부터, 특히 16세기 이후부터 더 뚜렷하게 나타난 현상은 급격히 진보하는 경제가 다른 영역에 대해서 우위를 차지했다는 점이다. 이런 우선권이 확립되는 것이 유럽 대륙이 일찍이 배태하게 되는 근대성의 뿌리 중에 하나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도약의 세기 이전에는 경제가 아무런 중요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든지, 상승해가는 경제의 힘에 비해서 사회 일반은 자기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사회는 실제로는 수세기 동안 지속적으로 가속화의 역할을 맡기도 하고 더 흔히는 장애물, 저항세력, 브레이크의 역할을 맡기도 했다. 역사가들에게 이 구조들의 영속성은 사정을 잘 드러내어 보여주는 특징이다. 이 역사적인 구조들은 눈에 보이고 파악할 수 있고 어느 정도 측정이 가능하다. 이 구조들의 지속성 자체가 하나의 척도가 된다. 이런 상충하는 여러 힘들의 전체 속에서 중세로부터 18세기까지의 경제성장이 조직되고, 자본주의가 나라마다 다른 속도로 느리게, 또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발전했던 것이다. 다음에서는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부딪히게 된 저항과 장애를 전면에 놓고 설명하려고 한다.


(1)사회의 여러 계서제들

 귀르비치는 계급투쟁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은 명확한 계급의식이며 이 계급의식이란 산업사회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았다. 그러나 거기에 반대되는 증거는 얼마든지 있으므로 “생산의 일부가 소비되지 않고 축적되는 모든 사회는 계급갈등을 내포하고 있다”는 알랭 투렌의 말이 더 맞는 것 같다. 그런데 계층이나 카테고리, 사회계급과 같은 말보다는 사회의 계서제라는 말이 평범하면서도 핵심적인 내용을 나타낸다. 계서제라는 말은 인구가 조밀한 모든 사회의 역사에 대해서 아무런 어려움없이 자동적으로 적용된다. 정치체제가 어떻게 바뀌었든 간에 상관없이 오늘날의 사회가 과거의 사회보다 더 평등해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특권에 대해서만은 반발이 하도 심해서 그것이 가지고 있던 순진한 특권의식만은 어느 정도 사라진 것이 사실이다.


사회의 복수성

 계서제 질서는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니다. 모든 사회는 다양성이며 복수성이다. 사회는 내부로부터 스스로 분해되며 이 분해 자체가 아마도 사회의 속성일 것이다. 16세기부터 20세기까지의 사회 전체를 자본주의라는 말로 지칭하는 것이 논리적이지 못한 것처럼 11세기부터 15세기까지의 사회 전체를 봉건제라는 말로 지칭하는 것도 논리적인 것이 아니다. 봉건제는 봉토에서 유래한 신조어로, 봉토와 그 봉토에 관련되어 있는 것만을 가리킬 뿐이지 그 이상은 아니다. 다만 소위 봉건사회라는 흔히 쓰이는 표현은 유럽 사회사의 매우 폭넓은 단계를 가리킬 수 있다는 사실과, 유럽사의 연속된 단계를 유럽 A, 유럽 B라는 식으로 지칭하는 것 같은 꼬리표 정도로 이 표현을 쓰는 것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도록 하자.(A에서 B로의 이행은 10~13세기 시기에 일어났을 것이다)

 귀르비치는 “봉건” 사회는 적어도 다섯 개의 “사회들” 내지 다섯 개의 상이한 계서제들의 공존으로 파악했다. ①영주제 사회. 이 계서제는 영주와 농민을 긴밀한 통합성 속에 묶어놓았다. ②로마 가톨릭 교회가 건설한 신정정치적인 사회. ③영토국가. 이것은 다른 것들 사이에서 함께 자라면서 그것들에 의존한다. 카롤링거 왕조와 함게 난파했지만 진짜 완전한 난파는 아니었다. ④좁은 의미의 봉건제. 국가의 실패로 만들어진 공백 속에서 상층으로 은연 중에 미끄러져 들어가 자리잡은 상층구조로서 계서제적인 긴 연쇄의 망 속에 영주들을 통합하는 가운데 모든 것을 유지하고 조종하려고 했다. 그러나 교회가 이 체제의 그물망 속에 완전히 잡혀 들어가지 않았고, 국가는 언젠가 이 그물을 찢어버릴 것이며, 농민들 중에서도 일부는 흔히 이 상층의 영향을 벗어나서 살아갔다. ⑤도시. 우리의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도시들은 10~11세기 이래 국가·사회·문명·경제와 별도로 발전했다. 이것은 우선 농촌과 도시 사이의 거대한 분업의 결과물이며, 교역이 재개되고 화폐가 재등장하는 것과 같은 대단히 유리한 국면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이것은 화폐의 도움을 입어 비잔틴 제국과 이슬람 권으로부터 출발하여 거대한 지중해권 전역을 통과해서 서양 전역으로 마치 전기가 흘러가는 것처럼 퍼졌다. 다음에 지중해가 기독교권이 되었을 때 초기 유럽의 재도약과 변화를 겪었다.

 귀르비치는 이런 것들을 잘 파악했으나 다소 성급하게도 이 다섯 개의 사회들이 적대적이고 서로 이질적이며, 이들 중 하나를 뽑아내버린다면 그것은 공백과 절망에 빠진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실 이 사회들은 함께 살아갔고 서로 섞였으며 하나의 응집성을 의미했다. 도시국가는 자신을 둘러싼 영주제적인 영지로부터 인력(농민만이 아니라 영주집단도)을 충원했다. 도시 주변 지역에서 태어난 영주들은 도시에 정주하면서 단단한 파벌을 이루었다. 교회 조직의 심장부인 교황청은 13세기부터 전기독교권에 대한 세금을 걷기 위해서 시에나의 은행가들에게 의존했다. 에드워드 1세 이후 영국 왕실은 루카와 피렌체의 대부업자들에게 돈을 빌렸다. 영주들은 곡물과 가축을 판매했으며 그것을 구매하는 상인에게 의존했다. 도시는 근대성의 원형으로, 근대 국가와 국민 경제가 탄생할 때 모델이 되었다. 도시는 늘 다른 사회를 희생해가면서 축적과 부의 장소가 되었다. 응집적인 전체사회라는 것은 곧 계서제의 어느 한 층이 다른 층들을 파괴하지 않고서도 전체를 지배하는 것일 것이다.

 하나의 전체사회를 공유하는 여러 개의 사회들 중에 어느 하나 혹은 일부 사회들이 다른 사회들에 비해서 우위를 차지하면서 전체의 변화를 준비한다는 것은 여전히 사실이다. 이 변화는 언제나 매우 느리게 이루어지다가 종래에는 단단히 자리잡게 되지만 그 다음에는 기존 승리자(들)에 대항하여 새로운 변형이 나타난다. 이러한 복수성은 변화에서든 변화에 대한 저항에서든 핵심적인 요소로서, 맑스의 것을 포함하여 모든 발전 도식은 이런 관점에서 보면 더욱 명확해질 것이다.


수직적인 관찰 : 소수의 특권층

 사회 전체를 위에서 내려다보면 제일 먼저 보게 되는 것은 정상에 위치한 한 줌의 특권적인 사람들이다. 대개 이 극소의 사회에 권력과 부의 생산의 잉여 중 많은 부분이 돌아간다 ; 통치, 관리, 지휘, 의사결정, 투자 과정의 장악(생산의 장악), 재화와 용역의 유통, 화폐 증감. 이들 밑으로는 경제의 대리인들, 모든 층위의 노동자들, 대다수 피지배민들 등이 층을 이루고 있고, 이 모든 것의 밑으로는 실업자의 세계라는 거대한 사회의 찌꺼지가 깔려 있다. 국가, 귀족, 부르주아지, 자본주의, 문화 등 무엇이든 간에 그것들이 사회의 최고점들을 장악하지 못하면 진짜 중요성을 확보하지 못한다.

 놀라운 일은 특권층이 언제나 아주 소수라는 점이다. 사회적 상승이 존재하고, 전체 잉여가 증가하면 사회 상층의 소수 인구도 증가할 법하나 실제로는 거의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과거에도 그렇고 오늘날에도 그렇다. 오늘날 민주체제에서도, 밀즈가 「파워 엘리트」에서 주장하듯 미국 전체의 중요한 의사결정이 놀라울 정도의 소수 집단에 의존하고 있다. 페스트가 크게 유행했던 1575년 이전에 베네치아의 귀족은 남자, 여자, 아이 모두 합해도 기껏해야 1만 명이고 이것이 베네치아 역사상 가장 큰 수였다.(인구 20만 명 중 5% 비율) 이 소수 중에도 몰락 귀족이 포함되었으며 부유한 대상인도 소수였다. 제노바에서도 귀족들은 약 8만 명의 인구 중 700명에 불과했다. 그나마 베네치아나 제노바는 높은 퍼센티지에 속한다. 뉘른베르크에서는, 14세기부터 한정된 귀족(법률로 규정된 43개의 귀족 가문)의 수중에 권력이 집중되었는데 이것은 도시 내 인구 2만 명과 도시 인접지역 인구 2만 명을 합친 전체 인구 중 150~200명에 불과했다. 런던에서는 엘리자베스 여왕 통치기의 말년인 1603년에 모든 사업이 대상인 200명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네덜란드에서는 17세기에 도시 과두 귀족들과 지방공직 보유자들을 합친 지배귀족들이 전체 인구 200만 명 중에서 1만 명 정도였다. 이런 양상은 16세기 안트워프 “상인들”, 리옹, 세비야의 상업재판소, 르 망의 8~9명의 대상인들, 됭케르크의 화폐귀족들, 마르세유 대상인들, 피렌체의 특권층(15세기에 3,000명이던 것이 1760년 경에는 800~1,000명 수준으로 하락), 18세기 피아첸차의 귀족가문들(250~300여개의 귀족가문들로 약 1,250~1,500명 정도인데 피아첸차 인근 농민 인구까지 합해보면 20만명 중 1% 수준에 불과하다)에서도 나타난다. 18세기 롬바르디아 전체에서 인구 중 귀족은 1% 정도를 차지했으나 이들이 토지재산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영토국가 차원의 계산에서도 같은 결과를 얻게 된다. 대체로 타당성이 있다고 입증된 그레고리 킹(1688)의 추산에 따르자면, 영국 전체에는 약 140만 가구가 있는데 이중 연수입이 200파운드가 넘는 가문은 36,000가구로 약 1.6% 비율이다. 이 비율은 대귀족, 준남작, 스콰이어, 젠틀맨, 국왕의 “관료”, 대상인, 1만 명이 넘는 법률가들까지 다 포함하여 얻은 것으로 너무 많은 사람들을 포함시킨 것이다. 마시가 제시한 수치를 보면 조지 3세의 즉위 당시인 1760년에 상인계급의 수입이 늘고 영주계급의 수입이 줄어서 부의 재편성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영국 내에서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진짜 부유하고 강력한 사람들을 계산해보면 이들은 150개 가문, 즉 600~700명에 불과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같은 시기에 프랑스의 구귀족의 수는 8만 명 정도이고 귀족 전체의 수는 약 30만 명이어서 프랑스인 전체의 “1~1.5%” 정도였고, 대부르주아지의 수를 구하기에는 수치 자료가 모자라다. 다만 브르타뉴에서 귀족의 비율이 전체 프랑스 왕국 평균보다 훨씬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비교적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곳 중에서 귀족의 비율이 높은 곳은 폴란드로, 전체 인구의 8~10%로 나타나는데 여기에는 가난한 귀족이나 유랑 귀족이 모두 포함된 것으로 진짜 중요한 특권층은 극소수였다. 상대적으로 특권층의 비율이 더 작은 다른 예들을 보면 표트르 대제에게 봉사하는 귀족, 중국의 만다린, 일본의 다이묘, 무굴 제국의 라자와 오메라, 알제리 섭정시대의 모험적인 군인들과 선원들, 스페인 령 아메리카의 소수 지주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결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소수 특권층이라는 것 자체가 어려운 문제를 제기한다. 그들은 혁명과 같은 사태 등을 거치면서 어떻게 유지되는가? 그들 밑에서 성장하고 있는 거대한 대중을 어떻게 위압하는가? 때로 국가가 특권층에 대한 투쟁을 전개할 때 이들이 완전히, 또는 결정적으로 패배하는 일이 한 번도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회의 심층이 아니라 “지배계급과 성장해 올라오는 계급의 정치적 자질”의 중요성을 인식하자고 강조한 막스 베버는 아마도 틀리지 않은 것 같다. 무엇보다도 과서 사회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혈연관계에 의한 것이든 재산 소유 정도에 의한 것이든 엘리트의 성격이 아닐까?


사회적 유동성

 엘리트의 재구성 내지 재생산은 대개 너무 느리고 미세한 움직임과 변천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측정하기도 힘들고 정확한 관찰도 용이하지 않다. 다라서 결정적인 설명도 힘들다. 로렌스 스톤은 상승 국면의 콩종크튀르는 사회적 상승에 유리하다고 보았고, 더 일반적인 차원에서 헤르만 켈렌벤츠는 다른 곳에서보다 경제생활이 더 빠르게 돌아가고 진척되는 해안지역에 있는 상업도시의 사회적 유동성이 내륙 도시들에서보다 더 크다고 보았다.(뉘른베르크라는 반동적인 도시에서보다 뤼베크, 브레멘, 함부르크에서 사회적 격차가 작다) 반대로 경제 하강은 상승의 문을 걸어닫고 사회적인 현상유지 경향을 강화시킨다. 피터 래슬릿은 전산업 시대의 영국에서 사회적 하강이 더 지배적이라고 주장해싿. 만일 모든 사회에 대해서 사회 최상층부에서의 등락에 관한 대조표를 작성해보면, 근대성이라는 것은 부와 권력의 확대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집중에 있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피렌체, 제노바, 베네치아 등지에서 특권 가문들은 규칙적으로 감소하거나 심지어 사라져버린다. 사회의 파괴를 가속화하는 그와 같은 정황에서는 필요한 보충작업이 가속적으로 일어나게 마련이어서 마치 사회가 상처를 아물게 하고 공백을 메우는 임무를 갑자기 재발견한 것처럼 보인다. 이런 관찰이 용이한 예로는 표트르 대제가 서시아 사회를 재조직하려 했던 때나 장미전쟁으로 위기가 고조된 영국이 있다. 장미전쟁이 끝나고 난 뒤, 1485년에는 50명의 대영주들 중에 29명만이 살아남아서 전쟁영주들의 시대는 다 지나갔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540년경에는 신귀족이 새로 자리잡았다. 헨리 8세 사망 이전부터 에드워드 6세(1547~1553), 메리 튜더(1553~1558)의 통치 기간 중에 이 귀족들은 점진적으로 행동이 자유로워지다가 곧 중앙정부에 저항하게 되었다. 표면적으로 대단히 활기에 넘쳤던 엘리자베스 시대(1558~1603) 이후 이 귀족들은 그들의 이권과 특권을 굳게 지키고 확대했다. 16세기 말경 영국의 시골 전역에 걸쳐서 거의 국왕 저택에 비견되는 건물들이 들어섰다. 귀족이 권력을 향해 상승하는 것은 영국 해상세력의 상승, 농촌 소득 증가, J.V.네프가 최초의 산업혁명이라고 불렀던 현상과 맞물려서 이루어졌으며 이들은 옛날만큼 국왕의 도움을 크게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래서 국왕이 1640년에 자신의 통제를 벗어났던 권력을 다시 장악하고자 했을 때에는 이미 대가 늦었던 것이다. 귀족과 대부르주아지는 내전의 힘든 시기를 지내다가 찰스 2세의 왕정복고(1660~1685) 때에 번영을 구가했다.

 부르디외, 뒤파키에, 쇼시낭-노가레, 장 니콜라 등은 사회적 콩종크튀르가 다른 무엇보다 결정적이라는 주장을 한다. 하나의 질서가 자리잡고 있으나 이것은 끊임ㅇ벗이 낡아가다가 어느날엔가 무너지고, 새로운 인물들이 최정상에 도달하여 과거의 상태를 회복한다. 이렇게 해서 새로운 졸부들, 새로운 특권층 사람들이 구귀족 사람들의 자리에 슬그머니 미끄러져 들어간 반면, 하층 농민들에게는 옛날의 특권들을 없애고 새로운 발전을 이끌어온 활기찬 충격이 오히려 사정을 심각히 악화시켰다.


어떻게 변화를 파악할 것인가?

 역사가들은 다소 도식적으로 상층, 중간, 하층 부르주아지라는 구분을 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일단 이것을 받아들이고 최상층만 떼어서 계산해보려고 한다. 최상층은 전체 부르주아지 중 ⅓이 못된다고 보아야 하며 이 수치는 귀족과 거의 같은 수에 해당한다.(베네치아나 뉘른베르크에서 도시 과두 귀족과 부유한 상인들의 수는 균형을 이루고 있다) 도시 과두 귀족과 바로 그 밑의 부유한 상인층 사이에서 사회적 상승이 나타난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지배계층은 장기적으로 볼 때에만 감소하는 것이고 아주 오랫동안 거의 같은 수중에서 유지되므로 사회적 상승이란 단지 빈틈을 메우는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정은 매우 복잡해서 때로는 지배계급이 스스로 이데올로기와 심성을 바꾸고 신참자의 것을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사회적, 경제적 배경에 의해서 그렇게 부가된 것들을 받아들이게 되고 때로는 자기 자신을 부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표기는 단순한 일도 아니고 완전한 것도 아니며 지배계급에게 반드시 팍구적인 것도 아니다. 신참자들을 상층으로 끌어올려준 경제 성장은 기성 계급에게 영향을 준다. 귀족들은 더더욱 기업활동에 전념하게 된다. 13세기 영주들, 16세기 말 영국 귀족들(젠트리와 함게 주식회사 참여), 18세기 헝가리, 독일, 덴마크, 폴란드, 이탈리아 귀족들, 루이 16세 치아의 프랑스 귀족들은 상업회되는 양상을 보인다. 결국 계서제 최상층의 여기저기에서 심성이 “부르주아화했다면” 그것은 신참자들이 상승하여 들어온 것도 있지만 프랑스에서처럼 막 시작되고 있던 산업혁명이라는 당대의 일반적 배경이 영향을 미친 면도 있다. 사업귀족은 새로운 경제가 꽃피는 장소에는 빠짐없이 나타났다. 그러므로 거대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던 이 귀족이 스스로를 부정하며 부르주아화하고, 자유주의적이 되고, 더 나아가서 국왕 권력에 제한을 가하려고 하며, 아무런 손해나 동요도 없는 1688년의 영국 혁명과 같은 일을 준비하는 것이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1789년 이전의 시기 동안에는 경제가 변화하면서 이것이 사회의 구조와 심성을 변화시켰다. 그것은 훨씬 전에 영국과 네덜란드에서 일어났던 일이고 그보다도 전에 이탈리아 상업도시들의 틀 속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유럽의 사회적 변화의 동시성

 유럽 전역의 여러 나라들 사이에 분명히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콩종크튀르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콩종크튀르는 동시에 나타난다. 예컨대 16세기 내지 1470~1580년 사이의 기간은 유럽 전체적으로 사회적 상승이 가속화된 시기이며 거의 생물학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자연발생적으로 도약이 이루어진 시대이다. 부르주아지는 상품거래를 통해서 스스로 사회 상층으로 올라갔고, 경제가 큰 활력을 띰에 따라서 때로는 아주 빠른 속도로 거대한 상업상의 부가 형성되었고 사회적 상승의 문은 활짝 열렸다. 반대로 16세기 말에는 장기적인 사이클 내지 연장된 인터사이클이 하강 국면으로 돌아섬에 따라서 유럽 대륙의 여러 사회는 다시 문을 닫았다.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에서는 일련의 보충적인 귀족화 현상을 통해서 영주사회의 상층 부분이 대폭 바뀐 후 사회적 상승의 문호를 괘 효율적으로 닫아버렸다. 따라서 이 과정은 보편적인 현상이다. 피에르 구베르가 16세기 프랑스 귀족의 쇠락에 관해 콩종크튀르의 영향을 배제하고 가톨릭 동맹과 그것을 둘러싼 격렬한 투쟁으로 설명하려 하는데, 오히려 그런 파국적인 사건들은 이 세기 말의 경기후퇴 국면에 합류했고 또 그 후퇴 국면의 한 표현 형태로 봐야 한다.


앙리 피렌의 이론

 앙리 피렌은 「자본주의와 사회사적인 단계들」에서 콩종크튀르적인 설명에서 벗어나 개인 및 가족 활동 차원에서 증명되는 규칙적인 사회 메커니즘 이론을 제시한다. 그는 전(前)산업화 시기의 자본주의가 르네상스 이전부터 존재하는 것으로 보는데 이와 관련하여 상업가문들은 두 세대, 기껏해야 세 세대가 고작일 정도로 지속성이 아주 작다고 언급했다. 그러므로 그는 상업왕조는 존재하지 않으며 각 시대는 각각의 자본가들을 가지고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이 자본가들은 과실을 얻으면 그곳을 떠나 가능하면 귀족 지위를 얻는다) 이런 관점은 많은 사실들에 의해서 확인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문제 삼을 것은 “창조력”이라는 말과 그것이 경영인에 대해서 만드는 이미지이다.

 창조력이라고 부르든 다르게 부르든, 그런 것의 후퇴 내지 변환은 어느 시대에나 있는 일이다. 16~17세기 독일 북부 도시들의 상업 가문들, 15세기 바르셀로나의 상업 왕조 구성원들, 16세기 남부 독일의 가문들, 18세기 루앙의 르 장드르 가문·플랑드로즈 가문 등이 보여주듯 상업가문들은 단순히 혈통이 끊어지거나 법관직을 바라고 상업활동을 포기함으로써 사라져갔다.

 상업회사들의 쇠락이 사업가 정신의 마모에 기인한다면 콩종크튀르는 여기에서 전혀 무관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려야 할까? 게다가 이 현상을 가지고 특별히 자본주의의 사회적인 현상이라 본다는 것은 상업적인 것과 자본주의적인 것을 혼동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모든 대상인이 자본가라는 것은 맞지만 그 반대는 꼭 그렇지 않다.자본가는 자금주일 수도 있고 매뉴팩처 경영인, 재정가, 은행가, 농업 경영인, 공공자금 운영인 등이 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내부적인 단계라는 것이 가능하다. 어느 상인이 차례로 은행가, 재정가, 자본 대여인 등으로 변화해갈 수 있으며, 이것은 수세대 동안 자본가로서 할 수 있는 일이다. 실제로 18세기 네덜란드를 보면 더 이상 상업활동을 하지 않는 가문들의 자본은 자본주의의 유통 밖으로 완전히 빠져나가지 않고 상품, 은행, 회사 결성, 동산이나 부동산에의 투자, 광공업, 이상한 모험사업 등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문제는 앙리 피렌이 이야기하는 자본주의의 단계들에서 중요한 것은 상업 가문이 아니라 그 가문들을 지탱해주고 부양해주는 이 가문들 전체 집단이다. 이 집단 전체로 보면 시대에 따라서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대신해서 들어서게 되지만 각 에피소드의 지속기간은 2~3세대보다 훨씬 길며 사업의 포기와 부흥 원인은 콩종크튀르에 따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 쇼시낭-노가레는 랑그도크 재정가들에 대한 연구로 명백한 증거를 제시한다. 이 사람들은 각각의 구성, 사업관계, 가족적인 연결에서 다른 하나로 이어질 때마다 단절과 교대, 사람들의 교체현상이 나타난다.

 마지막으로 상점, 회사의 지점, 관직, 토지 그 외의 다른 어떤 해결책들 중에서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사회가 제공해야만 자본의 사회적 단계들이 존재한다는 점이 있다. 그런데 어떤 사회는 오히려 길을 막아서 자기 직업 속에 매몰되는 모습을 보이는데 유대인 상인이나 유대인 자본가, 인도의 상인-은행가들, 오사카의 부상 등이 이에 해당한다.


프랑스 : 젠트리인가, 법복귀족인가?

 우리가 어느 사회를 이해하려고 하면 과거의 사회, 현재의 사회, 미래의 사회가 동시에 혼재하는 것을 보게 되며, 또 항상성과 그로부터의 왜곡이 장기지속 속에서 누적되어가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16~17세기 프랑스의 상층사회가 좋은 예인데, 조지 후퍼트는 「프랑스의 젠트리」를 통해 탁월한 재해석을 시도했다. 여기에서 젠트리란 프랑스 부르주아지의 상층을 가리킨다. 이 층은 상업을 통해서 부를 쌓았지만 한두 세대 전부터 상업을 떠나 대토지 경영, 돈놀이, 관직 구입을 통해 부와 안락한 생활을 누리는 알뜰하고 보수적인 사람들이다. 이 계급은 화려한 귀족이나 “시골 귀족”과 무관하며, 자기 자신이 생각하는 귀족의 이념과 그 자신에게만 속하는 생활양식을 향해서 전진했다.

 부르주아지라는 용어는 부르주아라는 용어와 운명을 같이 했다. 두 용어 모두 12세기부터 사용된 말이며, 부르주아란 한 도시의 특권 시민을 가리켰다. 이 말은 지역이나 도시에 따라 16세기 말이나 17세기 초에 가서 널리 퍼졌고, 18세기에 일반화되었으며, 프랑스 혁명이 이 말을 널리 쓰이게 만들었다. 부르주아 대신 쓰이던 명사라는 표현은 사회적 상승의 제1계단을 가리킨 것으로 직업은 변호사, 대소인, 공증인 등 법률직이었다. 그러나 명예로움은 직업만이 아니라 상당한 부 소유, 상대적으로 유복한 삶, 위엄있는 생활, 도시 주변에 어느 정도의 땅 구입, “거리로 박공이 난” 집이 필요했다. 즉 극소수의 명예로운 사람들은 “젠트리”보다 상위 존재들로, 이들의 지위에 도달하거나 그 근처에 가려고 하면 우선 “귀족적인 사람”이라는 한 단계를 추가로 거쳐야 한다. 문제는 이 “귀족적인 사람”은 법률적으로는 귀족이 아니고 허영과 사회적 현실을 다 고려해서 나온 명칭이란 점이다. 이들은 “진짜 귀족”이 아니며 “부적당하고 불완전한 명예직 귀족”에 속하며 “경멸적으로 도시귀족”이라 불리는데 이것이 바로 “부르주아지”이다. 어느 지위에 속하는가 하는 문제는 법률적 사실이 아니라 사회적 사실로, 사회적 사실이란 통용되는 관례들로부터 스스로 만들어진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귀족 지위로 진입할 때의 일반 조건들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1520년 이후 이런 귀족의 진입은 큰 어려움 없이 이루어져서 눈에 띄게 많아졌는데 “귀족적으로 산다”는 것과 그 조상들도 귀족적으로 살았다는 것을 증언해줄 사람을 통한 법률적 조사가 중요햇다. 이것은 국왕이 판매하는 귀족 증서, 귀족 지위를 보장해줄 관직, 귀족 지위에 부수하는 행정관 직무 수행보다도 중요했다. 그런데 신귀족이 언제나 전통적인 구귀족의 지위로 녹아들어가고 싶어하지 않았다는 것이 사태를 더 복잡하게 한다. 상층 부르주아이든 중간 부르주아이든 귀족계그급의 생활양식을 경멸하고 이를 글로 표현했다. 귀족이 된 대부르주아는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노동과 상업을 거부하고 무위도식을 즐겼는데, 그 무위도식이란 독서하고 동료들과 유식한 토론을 즐긴 것이란 측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신귀족들의 이런 생활은 합리적으로 경영하는 토지, 농민과 귀족을 피해자로 하는 고리대금업, 사법과 재정 방면의 관직이라는 세 가지 근원에 기반한 재산이다. 이 재산은 물려받은 것이나 처음 궤도에 오른 과정은 언제나 상업이다. 17세기에 유사 귀족들은 종교개혁과 종교전쟁 등의 곤경을 겪는데, 이들은 “갈리아주의자”나 “폴리티크”라는 중도적인 노선을 택했다. 또한 앙리 4세, 리슐리외, 루이 14세에 의해 복원된 왕정은 억압적이 되어 궁정귀족을 강화하고 “법복귀족”을 억압했다. 기존 귀족들에 대한 확인조사가 이런 상황을 잘 보여준다. 반(半)귀족 집단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모호한 위치에 놓이자 서서히 법복귀족이 되어갔다. 이에 대해 궁정귀족들은 이들이 섞여들어오는 것을 허용치 않고 공격했다 .이후 이 두 귀족 사이에는 명백한 계서제가 세워지고 국왕은 자신의 통치를 위해서 이들을 대립시키곤 했다.

 법복귀족들은 자신들을 잘 유지하기 위해서 모든 계서제들(영주적인 토지의 계서제, 돈의 계서제, 교회의 계서제, 국가의 계서제, 문화의 계서제)을 이용했다. 이 모든 것은 복잡하고, 매우 느린 과정이었으며, 상당한 무게를 지니고 있고, 오직 끝내 버텨냄으로써만 성공을 획득하는 것이었다. 조지 후퍼트가 보기에 법복귀족은 16세기의 기원부터 프랑스 혁명까지 프랑스의 운명의 한복판에 위치해 있으면서 “자신의 문화를 창조하고 자신의 부를 관리하며 민족과 계몽주의를 동시에 발명함으로써 결국 프랑스를 발명했다.” 원인은 어디에서나 대단히 유사하지만 해결책은 상이하다.


도시에서 국가로 : 사회와 과시적 사치

 사회적 유동성에 관한 문제, 혹은 돈, 출생신분, 권력에 의한 위엄 앞에서 어떠한 태도를 취하는가에 관한 문제에서 어디에서나 통하는 일반적인 법칙을 끌어낼 수는 없다. 그러나 유럽에 관해서 보면 두 개의 카테고리로 구분이 이루어진다. 우선 일찍이 부를 축적한 이탈리아, 네덜란드, 독일 등지의 상업도시들과 같은 도시 사회가 있고, 다른 하나는 영토국가라는 넓은 반경의 사회이다.

 상인이 주도권을 장악한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밀라노 1229년, 피렌체 1289년, 베네치아는 적어도 1297년)에서는 돈이 사회질서를 접합해주는 효과적이고 신중한 접착제였다. 도시 과두 귀족들은 통치를 위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현혹시킬 필요를 그리 크게 느끼지 않았고, 단지 돈주머니의 끈을 잘 잡고 있는 것으로 족했다. 베네치아에서 사치는 장엄한 공공 기구나 엄격히 사적인 생활에만 한정되었다. 제노바에서도 귀족들은 어느 정도 엄격하게 도를 지키며 옷을 입었고, 축제도 길거리나 공공 광장이 아닌 시골 저택이나 도시의 궁정 안에서 신중하게 치러졌다. 암스테르담이 유럽 최후의 폴리스로 남게 된 것도 베네치아의 방문객들조차 놀랄 정도로 이곳 부자들이 검소하게 살았기 때문이다.

 근대 국가의 수도나 왕도로 가면 분위기가 완전히 바뀐다. 여기에서는 검소함이나 신중함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사회 상층에 있는 귀족은 궁정의 장대함에 경탄하고 다음에는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 대해서 경탄하게 만들려고 한다. 으리으리하게 과시하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을 지배하고 그들을 자신과 분리하려는 것이다. 돈을 가지고 있으면 거의 저절로 수중에 장악하게 되는 종류의 특권과는 달리, 출생과 지위에 따른 특권은 다른 사람이 알아주어야만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사는 방식 내지 보이는 방식이 있는데 하나는 과시이고 하나는 신중함이다. 돈에 근거한 사회가 아주 뒤늦게서야 자리잡게 되는 곳에서는 옛날식 정책인 과시적 사회가 지배계급에게 의무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심지어 상업도시들도 사치에 완전히 문을 닫아건 것은 아니지만 이런 곳에서 그 문이 지나치게 많이 열리는 것은 이곳의 조직이 와해되고 사회적, 경제적으로 이곳이 불편해진다는 표시이다. 1550년 이후 베네치아의 사치금지법은 호화로운 지출을 막았다기보다는 그런 지출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줄 뿐이다.

 영국에서의 사태는 훨씬 복잡하여 17세기에는 모든 것이 사치 영역이 되었다. 그러나 18세기와 특히 조지 3세의 긴 치세기(1760~1820) 동안 영국의 부유하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이제 차라리 화려함보다는 편안함이라는 사치를 선호했다. 대략 종교개혁 시기 이후 사회계서제의 상층에 올라온 귀족이나 대귀족은 최근에 형성된 층이다. 그러나 이해관계에 관한 것말고도 많은 이유에서 이 계급은 토지귀족의 면모를 유지하려고 했다. 영국의 대가문은 대영지를 가지고 있으며 그 한복판에 성공의 상징으로서 궁정과 같은 대저택이 있었다. 이 귀족은 “금권정치적이면서 동시에 봉건적”이어서 봉건귀족적인 소란을 벌여대며 지방 권력을 확고히 잡으려 한 동시에 사업에 대한 취향과 그 수행을 멈추지 않았다. 엘리자베스 시대 이래 원거리 무역에 가장 크게 투자한 사람들이 피어즈(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라는 상층 귀족이었다. 네덜란드에서 계서제의 최상층에 있는 사람들은 도시의 과두 귀족으로서 프랑스의 “종성귀족”에 해당하는 사람들인데, 이들은 부르주아 대귀족이다. 프랑스에서는 궁정이 지배하는 수도와 대상업도시들이 다르게 진화해갔다. 툴루즈, 리옹, 보르도같은 대상업도시의 대상인들은 거의 사치에 빠지지 않았고, 도시에 있는 그들 거주지의 실내나 “말을 타고 하루 정도 거리에 떨어져 있는 도시 주변의 시골 저택과 별장”에 사치를 한정시켰다. 이와 반대로 18세기에 파리는 극히 부유한 재정가들이 상층 귀족의 생활방식을 흉내내려는 갈망으로 가득했다.


혁명과 계급투쟁

 사회 하층에 자리잡고 있는 대중들이 조금 심하게 요동하는 듯하면, 사회는 망을 더 세게 죄거나 그물의 줄을 죄는 다른 방식을 발명한다. 여기에서 사회질서의 기반을 수호하는 국가는 불평등을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 것들을 대변하는 문화적인 요소들도 이 방향으로 작동해서 체념, 복종, 현명한 처신을 강조했다. 그러므로 차라리 더 나은 해결책은 일반적인 균형을 흔들어놓지 않는 한도내에서 사회의 “유기적인” 대중이 스스로 발전해가는 것이다. 계서제의 하층으로부터 바로 그 위의 계단으로 올라가는 것은 금지되어 있지 않았다. 이와 같은 사회적인 “단계”를 둘러싼 소규모 드라마들, (1624년 스페인의 한 피카레스트 소설 주인공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내가 나 자신이 되기 위한 투쟁은 어느 정도 계급의식이 성장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 사실을 증명해주는 것인 기존 질서에 대한 봉기는 무수히 많이 일어났다. 이브-마리 베르세의 조사에 의하면 1590~1715년 동안 아키텐에서 일어난 농민봉기 내지 유사 봉기가 500건, 1301~1550년 동안 독일의 100여개 도시들에서 200여 건의 봉기가 있었고 그중 일부에서는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리옹에서는 1173~1530년 동안 126건의 봉기가 일어나서 평균적으로 3년에 한 번 봉기가 있었던 셈이다. 이들 중 일부는 대단히 난폭한 양상을 보여서 혁명이라는 말을 써야만 맞을 정도라는 점은 확실하다. 농민 세계는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것들(국가, 영주, 외부 상황들, 불경기, 군대 등)과 농민 세계를 위협하거나 적어도 농촌 공동체와 그것의 해방 조건들을 방해하는 것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투쟁했다. 1530년경 한 영주가 공유림에 자신의 돼지들을 풀어넣자 나폴리 백작령에 있는 놀리세라는 작은 마을이 방목권을 지키기 위해서 들고 일어서서 “민중 만세, 영주 타도”라는 구호를 외쳤다. 전통적인 심성들과 농민들의 삶의 특별한 조건들을 증명해주는 이런 사건들은 19세기 중반까지 연이어 터졌다. 잉고마르 보크가 언급했듯이 만일 반복, 같은 이야기의 연속, 단조로움 등의 특징을 가지는 “장기지속”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 것을 찾는다면 농민사야말로 좋은 예들을 보여줄 것이다.

 1358년 일-드-프랑스 지방의 자크리, 1381년 영국 노동자 봉기, 1525년 농민전쟁, 1548년 염세에 저항하는 기옌 코뮌들의 반란, 17세기 초 러시아 볼로트니코프의 봉기, 1614년 헝가리의 도자 봉기, 1647년 나폴리 왕국의 농민전쟁 등 이 모든 격노한 폭발은 모두 실패에 그쳤다. 연이어 터져나왔던 소규모 봉기들도 마찬가지였다. 시골이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크기 때문에 농촌 세계의 봉기는 사회와 경제의 전구조를 붕괴시킬 우려가 있어서 기존 질서는 이를 용인하지 않았다. 거의 언제나 국가, 귀족, 부르주아 소유계급, 더 나아가서 교회와 도시까지 가담하여 농민에 대항해서 연합했다. 그러나 농민들이 언제나 다시 복종하도록 억압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봉기가 끝난 후에는 진보를 이루게 된다. 1358년 자크리 참가자들은 파리 주변 지역에서 농민의 자유를 획득했고, 1525년 농민전쟁의 결과 엘베 강과 라인 강 사이의 봉기 농민들은 엘베 동쪽의 농민들과는 달리 다시 농노 상태로 전락하지 않고 자유와 옛 권리들을 지켜냈다. 1548년 기옌 지역은 초토화되었지만 염세가 사라졌다.(이때까지 염세란 국왕 정부가 마을 경제를 억압하고 외부와 교통하도록 강제하는 데 쓴 매개물이다) 1789년 가을과 겨울 동안 농촌지역에서 일어났던 혁명들은 결과적으로 실패했다고 보일 수도 있으나 봉건 권리를 없앤 것은 가소로운 정도의 선물이 아니다.

 “산업” 활동은 원래 불안정한 고용을 특징으로 하고 있고 이 활동이 규칙적으로 붕괴해버려서 노동자들의 소요 자체가 분산되었다. 노동자들의 세계는 끊임없이 집중되었다가 분산되고 다른 노동 장소, 다른 직업으로 내쫓기게 되므로, 노동자들의 소요에는 성공을 보장해주는 조건인 협동의 안정성이 결여된다. 노동계급이 취약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원인은 노동자들이 아주 작은 단위로 모여 있고, 저니맨 노동자들이 스스로 떠돌이 생활을 하려고 했으며, 이들이 농민이면서 동시에 임금노동자로서 농촌고 도시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어서 노동의 집중이 불완전했기 때문이다. 도시의 노동자들을 보더라도 이들은 언제나 분열되어 있고 부분적으로는 옛 길드 체제에 묶여 있었다. 도처에서 모습을 드러내던 자유노동도 통합성을 보이지는 못했다.(상층부터 보면 상대적으로 특권적인 위치에 있는 “임금을 받는” 장인들, 가족노동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광범한 임금노동자층, 특별한 기술이 없는 일용 노동자들) 이런 조건에서는 노동자들의 항의나 봉기의 역사가 서로 연결되지 않고 점묘화처럼 짧은 에피소드들로 나타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계급의식이 전혀 없었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오류다. 사실 노동자들의 세계 전체가 보잘것없는 보수와 구제할 길 없는 실업의 위협 가운데에 포위되어 있었다. 이 포위에서 벗어나는 것은 폭력을 통해서만 가능할테지만 이 당시의 노동자들은 실업이 심각한 오늘날의 노동자들처럼 힘이 없었다. 그러므로 폭력, 분노, 원한이 터져나올 것은 당연하나, 프랑스 혁명 직전 제지업 노동자들처럼 성공 혹은 절반의 성공을 경우가 1번이면 실패한 사례는 100번 정도가 된다. 그와 같은 장벽을 쉽게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몇 가지 예들

 리옹에 인쇄기가 처음 도입된 것은 1473년경이다. 최초의 대파업이 일어나기 직전인 1539년에는 100여 대의 인쇄기가 있었다. 즉 도제, 저니맨(조판공, 인쇄공, 교정공), 매스터 등을 합쳐서 1,000여 명의 일꾼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 거의 대부분은 프랑스의 다른 지역,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 캉통에서 들어온 외지인들이었다. 작업장들은 대개 소규모로 주인은 보통 인쇄기 2대를 가지고 있었다. 필요한 재료는 비싼 것들이었고, 유동자본(임금, 종이와 활자 구입)이 많이 필요했는데 작업장 주인은 자본계급을 대변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들은 출판업자 수중에 매여 있었는데, 상업 재판소 당국이 출판업자의 편이었기에 이들이 이윤을 올리고 살아가는 유일한 길은 임금을 깎고 노동시간을 증대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정책 수행에 있어서 리옹 시 당국의 도움은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식사 제공을 식비 제공으로 바꾸거나 임금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도제를 사용(심지어 도제에게는 금지된 인쇄기 사용까지 맡기며)하거나 고정임금 수준을 다양화하되 가능한 한 저임금의 방향으로 폭을 넓혀가며 임금 지불 방식을 바꾸었다. 그리고 새벽 2시부터 밤 10시까지 각각의 노동자가 하루에 3,000장을 찍어내야 했다. 그러자 파업을 일으키고 파업 가담자들이 불참 노동자들을 두들겨패거나, 선전 쪽지를 돌리고 법정 투쟁을 하거나, 길드를 버리고 그들 자신의 결사를 구성하거나, 선전을 위해 리옹 시의 정기 축제나 광대 행진을 이용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해도 이들은 패배를 맛보았고, 후일 거둔 약소한 승리조차 1572년에 또다시 패배했다. 놀라운 것은 이 미소한 싸움에서 모든 것들이 근대적인 면모를 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인쇄업이 근대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사업이라는 것은 사실이며 어디에서나(1504년 베네치아의 알도 마누치오의 작업장, 1560년경 제네바, 파리에서는 리옹과 같은 연대인 1539년과 1572년) 같은 원인이 같은 결과를 가져오는 법이라서 대규모 파업과 소란이 벌어졌다.

 그와 같은 증거나 조숙성은 예외적인 것이 아니다. 활동적인 고용주와 비정상적일 정도로 집중된 노동력 위에 일찍이 발달해 있었던 직물업이 그렇다. 17세기의 강력한 매뉴팩처 도시인 레이덴이나 1738년의 브리스틀 근처 모직물 공업지역 월트셔의 옛 중심지인 새럼에서 그런 모습을 간접적으로 읽을 수 있다.

 레이덴의 특징은 이곳이 17세기 유럽 최대의 직물 생산지였다든가 이런 생산을 조직하기 위해서 남부 네덜란드와 북부 프랑스로부터 수천 명의 노동자들을 끌어왔다는 점만이 아니다. 레이덴 주변의 농촌들이 부유했기에 베예트나 세예트 직물 생산에 필요한 많은 과정을 이 도시 혼자서 담당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모든 것은 한 가지 절대적인 준칙의 명령하에 있었다. 암스테르담은 사치스러운 직물을 생산, 하를렘은 유행을 따르는 직물을 생산, 레이덴은 중하급 양모를 사용한 값싼 직물 생산에 전문화했다. 또 이때까지 계속 유지되던 길드 체제는 자신의 옆에 새로운 기업, 작업장, 매뉴팩처라 부를 수 있을 만한 것을 발전시켰으며, 가차없는 착취의 면모를 보이는 가내노동이 확산되고 있었다. 이곳의 일부 기업가들이 성공한 것은 사실이지만 레이덴의 모든 활동은 암스테르담 상인들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자본주의의 틀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여기에서 파업이 터져나왔다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나 파업 횟수가 매우 적었다는 점(포스투무스에 의하면 1619년, 1637년, 1644년, 1648년, 1700년, 1701년), 1644년과 1701년의 대규모 노동운동의 성격을 가지는 예외적인 경우를 빼면 나머지는 에피소드적인 것이거나 일부 노동자 집단에 한정된 부분적인 파업이었다는 점, 이 사건들이 모두 역사 연구의 조명을 거의 받지 못했다는 점이 놀랍다. 레이덴 직물업 조직의 지배적인 특징은 감시, 억압, 투옥, 사형 집행과 같은 거역할 수 없는 기성의 강압수단들이었다. 이 도시의 과두 귀족은 특권층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잔인하게 지배했고, 매뉴팩처 경영자들은 홀란드 주 전체, 나아가서 네덜란드 전체에 확대된 일종의 카르텔을 구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2년마다 모여서 일종의 “협의회”를 구성하여 해로운 경쟁을 배제하고, 가격 및 임금수준을 동결하며, 경우에 따라서 실제적인 것이든 가능성만 있는 것이든 노동자들의 소요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할지 결정했다. 이러한 근대적인 조직을 보고 포스투무스는 계급투쟁이 고용주 층위에서 더 의식적이고 전투적으로 벌어졌다는 결론을 내렸는데, 이것은 역사가가 문서를 보고 받게 된 인상에 불과할 것이다. 공식적으로 노동조직은 금지되었고 그들이 규칙적으로 회합하는 결사체에서 노동자들은 공개적인 발언이나 행동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경영주들이 드러내는 반응만 보더라도 노동자들의 침묵이 단순히 무관심이나 무지, 현실 수용을 의미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확실하다.

 1738년의 새럼은 직물업의 옛 중심지로서 매뉴팩처 경영자보다는 상인에 가까운 “클로디어”라는 직물업자의 지배를 받았다. 이곳에서 일어난 단기간의 봉기는 일부 직물업자들의 재산을 공격대상으로 삼았다. 이에 대한 억압적인 조처가 신속하게 이루어져 세 명이 교수형에 처해졌고 다시 질서가 잡혔다. 그러나 이것은 파급효과가 적지 않은 사건이었다. 이 봉기가 일어난 영국 남서부 지역은 적어도 1720년 이후에 사회적 소요가 빈번했던 곳이다. 1738년의 사태로 인해 1739년과 1740년에는 팜플렛들이 출판되었는데 이것들은 노동자들이 쓴 것이 아니라 조화로운 질서의 회복을 바라는 이들의 작품이었다. 장벽의 양쪽 모두에서 입장이 뚜렷하게 갈라졌고 그 장벽은 확고하게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고 그 장벽은 18세기에 소요들이 점증하면서 더욱 공고해졌다.


질서와 무질서

 그러나 이런 소요들은 지방적이고 좁은 공간에 한정된 것들이었다. 1280년 이후 강, 피렌체 치옴피(모포공) 봉기가 일어난 이후의 노동자 봉기같은 것들은 제한된 규모지만, 이 봉기가 일어난 도시 자체가 독자적인 하나의 세계였다. 그러나 1539년 리옹 인쇄 노동자들의 봉기는 파리 고등법원에까지 이르렀는데, 그렇다면 이후 영토국가는 규모가 크다는 이유에서 에피소드와 같은 이런 봉기들을 조립시키고 사전에 제약하고 또 봉쇄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국가가 취약해지면 동요를 불러일으킨다. 이 소요 자체가 원위의 약화를 잘 말해준다. 예컨대 1687~1689년, 1690~1699년에 프랑스는 큰 소요를 겪었다. 루이 15세와 루이 16세 치하에서 “정부의 권위가 미끄러져 빠져나갈 때” 하찮은 중소도시들에서도 나름의 “폭동”과 “음모”가 일어났다. 파리는 60여 차례의 반란이 일어났고 리옹에서도 1744년과 1786년에 격렬한 항의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정치적, 경제적 배경은 단지 설명의 첫 단초만 제공할 뿐이고 감정적 동요와 사회적 불만을 행동으로 옮기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적 배경, 언어, 슬로건, 사회의 지적 공모 등이 필요했다. 예를 들어 계몽주의의 혁명적인 사상은 무위도식하는 영주층의 특권을 비판하고 그 대신 상공업자나 진보적인 농업경영 지주 등과 같은 활동적인 사람들을 진보라는 이름으로 변호했다. 프랑스에서 16~18세기 사이의 정치사상과 사회적인 입장의 기저에는 왕정과 귀족 그리고 고등법원의 대표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권위의 충돌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이 세기의 상승 세력인 부르주아는 아예 이 논쟁에 등장하지 않는다. 당시 부르주아들이 특권층으로 보이지 않은 이유는 단지 18세기의 “혁명가들” 자신이 “부르주아지”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18세기에 다른 종류의 문제의식, 즉 다른 종류의 특권에 대한 공격을 자본가들이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출생에 의한 계서제와 달리 돈에 의한 계서제는 독립적인 또 하나의 해로운 질서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대귀족의 무위도식과 비교하여 활동적인 계급의 노동이 사회적으로 유용하다고 보았다. 아마도 이것이 19세기에 권력의 최정상에 오른 자본주의가 태연자약하게 자신의 자긍심을 가지게 된 원천일 것이며, 이로부터 공공선을 만드는 장인, 노동과 검약 등 부르주아지의 건전한 도덕을 대변하는 사람, 식민지 사람들을 문명화시키고 복리를 증진시키는 사람 등 전형적인 기업가의 이미지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이런 경제적 미덕의 이미지는 오늘날까지 사실과 모순되면서도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사실 맑스도 자본주의와 경제적 진보를 동일시하지 않았던가?


영점(零點) 이하의 사람들

 사회 소요를 막는 또 다른 제동 요인으로는 이전의 모든 사회들이 거대한 하층프롤레타리아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노예제는 중국, 인도, 이슬람권, 러시아, 이탈리아 남부, 스페인, 포르투갈, 아메리카 대륙에서 나타난다. 대부분의 유럽 지역에는 농노제가 남아 있었다. 그런데 폴란드나 러시아의 예놀이나 서유럽의 많은 지역에 있는 반분 소작농 사이에 정말 커다란 차이가 있었을까? 일거리가 없는 하층 프롤레타리아 사람들, 영구적인 실업자들이 늘 그런 상태로 살아갔다. 서양에서는 11~12세기중에 도시와 농촌 사이에 심층적인 분업이 이루어진 결과 가진 것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결정적으로 이 분업에서 배제되었고 그리하여 일거리를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 이 무력한 사람들은 대개 여기저기에서 시간제 일자리를 찾고 임시 숙소를 전전하며 근근이 살아갔다. 그 외에 불구자들, 늙은이들, 길거리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은 활동적인 사회 생활에 거의 전적으로 참여하지 못했고 빈민, 걸인, 유랑인 순으로 꼬리표가 붙여졌다. 자기 노동으로 빠득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잠재적인 빈민이었고, 곤란에 처하면 구호를 찾아야만 했다. 불행이 한 걸음 더 진척되면 구걸과 유랑의 문이 열린다. 대개 각각의 시 고문서 보관소에서 찾아볼 수 있는 빈민들은 좋은 빈민들로, 이들은 고달프긴 하지만 어쨌든 받아들일 만한 삶의 하한선을 보여준다. 리옹의 문서들은 16세기에 대한 측정과 계산을 해 볼 가능성을 제공한다. “가난의 문턱”인 하한선은 실질임금과 생계가격(빵 값) 사이의 관계에 의해서 정해지며, 일반적으로 일당 중 절반이 음식 소비에 지출되었다. 그러나 임금 규준들이 아주 유동적이어서 16세기에 노동지상 상황은 악화되어갔다는 것을 재확인시켜준다. 사실 진보라는 것은 늘 그렇듯이 노동자들의 피해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가난의 문턱” 아래에 존재하는 “유랑인”과 “걸인”의 지옥에 대해서는 문서 자료가 거의 없으나 빈민들의 물결이 휩쓸고 간 사회에서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이미지는 게으르고 위험하고 가증스럽다는 것으로 바뀌어갔다는 것을 알 수 잇다. 공공장소에서의 구걸과 유랑을 억압하는 조치가 계속해서 취해졌고 결국에는 이런 것들이 곧바로 범죄로 취급되기에 이르렀다. 체포된 유랑인은 채찍질을 당하거나 “수레 꽁무니에서 사형 집행인에게 매질을 당했다.” 사람들은 이들의 머리를 박박 깎고 달군 쇠로 낙인을 찍었는데, 다시 잡히면 노역수로 보냈다. 가끔 일제 검거를 한 뒤에 몸 성한 걸인들은 작업장을 만들어 보내거나 성벽 둘레 구덩이 청소나 성벽 수리를 시켰다. 1574년에 영국 의회가 결의한 유랑인의 노예화는 노예에게 일을 시킬 주체가 개인이냐 국가냐를 정하지 못해서 2년만에 파기되었다. 결국 17세기에 널리 퍼진 해결책은 노예제적인 감금과 강제 노역이었다. 이탈리아의 알베르기 데이 포베라(빈민 수용소), 영국의 워크하우스(강제 노동소), 제네바의 디시플린(감화소), 독일의 추흐트호이지(훈육원), 파리의 많은 강제수용소들은 유랑자들이 감금 대상임을 보여준다. 또한 높은 사망륭은 당국의 걱정을 덜어주었으나, 결국 엄청난 숫자가 다시 충원되었다. 1545년 3월에 베네치아에는 걸인의 수가 6,000명이 넘었고, 1587년 7월 중순 파리에서는 걸인이 17,000명, 18세기 중엽의 리스본에서는 10,000명 정도의 유랑인이 있었다. 주변에 공원, 공터, 그리고 우리가 빈민촌이라고 부르는 곳이 이어져 있는 도시는 매일 밤마다 극심한 치안부재 상태에 빠졌다. 경찰은 이런 유동적인 대중 앞에서 무기력했으며, 이런 사람들은 공모자를 가지고 있고 가끔은 도시 한복판에 진짜 걸인 조직을 이루고 있는 수도 있었다. 18세기에 들어와서 경제적 성장이 이루어졌으나 그 효과를 무산시켜버리는 인구증가 때문에 빈곤은 더 심해졌다. 군대는 하층 프롤레타리아들의 피난처였으나, 전쟁은 일시적이어서 탈영병들이 끊임없이 길거리로 쏟아져나왔다. 심지어 한쪽 군대에서 다른쪽 군대로 넘어가는 것은 일상적인 사건이었다.

 사회로부터의 유리 현상이 그 정도로 나타났다는 것은 과거 사회가 가진 가장 심각한 문제였다. 니나 아소토로브라이는 18세기 말 폴란드라는 틀 속에서 이 현상을 연구했는데, 도망한 농노, 몰락 귀족, 극빈 유대인 온갖 종류의 도시 빈민 등 “유동” 인구는 폴란드 왕국 최초의 매뉴팩처 설립자들의 주목을 받았으나 결국 일종의 반(反)사회를 구성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일자리가 없는 다수의 대중이 존재한다는 것은 노동시장에 압력을 가하기는 하나 대개 긴급한 임시 농업노동력, 도시의 비숙련 노동자들이 이에 해당되었고 정상적인 노동시장과 임금에 대해서는 영향력이 적었다. 유랑하는 하층 프롤레타리아가 염려를 불러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큰 세력이 되지 못했던 것은 이들이 응집력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스스로 폭력을 행사하더라도 그 다음 행동이 없었다. 이들은 계급을 이룬 것이 아니라 군중에 불과했던 것이다.


지옥에서 나오기

 지옥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때로는 가능하겠지만 결코 혼자서는 할 수 없고 그나마 곧 사람에 대한 사람의 긴밀한 종속관계가 다시 맺어지게 된다. 다른 편의 사회조직으로 가든지, 아니면, 독자적인 법을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사회조직을 일종의 반(反)사회 속에 만들어야 한다.

 밀매 및 밀수 조직은 그들 나름대로 또 다른 질서를 수립하고 있고 훈련을 거친 단결된 조직을 가지고 있다. 반도(叛徒)들은 자신들의 두목들과 합의제도 그리고 영주의 성격을 가지는 지도층을 조직하고 있다. 약탈과 해적질의 배후에는 대개 적어도 하나의 토지를 배경으로 두고 있다. 알제, 트리폴리, 피사, 발레타(몰타의 수도), 세냐 등이 베르베르 해적 기지이거나 성 스테파노 기사단, 몰타 기사단, 우스코크(세르비아-크로아티아인들 중에서 15세기 이래 터키의 공격을 받고 오스트리아나 베네치아 쪽으로 피신해온 사람들로, 그후 이들은 달마티아 등지에서 터키를 공격하여 그곳에 자리잡고 베네치아 상선을 자신들의 함대로 공격했다)의 기지이다. 그리고 언제나 충원되는 군대는 정상적인 삶을 보장하는 구호소와도 같았다. 거대한 하인의 세계는 언제나 열려 있는 유일한 노동시장으로 인구상승 시기나 불경기 때에는 이곳으로 사람들이 몰린다. 16세기 리옹에서는 각 지역에 따라서 하인들이 전체 인구 중 19~26%를 차지했다. 사실 검소한 집이라고 해도 온 식구가 한 방에서 사는 수준만 벗어나면 하녀와 하인을 두곤 했으며 농민들도 모두 시종을 데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 하층 사람들은 비록 그들의 주인이 형편없는 자더라도 복종해야만 했기에 충성심이 낮았다.

 어디에서나 국왕, 국가, 계서제를 이루는 사회는 복종을 강요한다. 구걸에 나설 지경에 빠진 빈민들은 남의 손에 들어가게 되든지 방기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맑스가 말한 노예제, 농노제, 노동계급의 구분은 끊임없이 쇠사슬을 상기시킨다. 그 쇠사슬의 성격이 달라졌다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하나의 노예제를 없애면 또 다른 노예제가 생긴다.

http://ilwar.com/history/253653
드문드문 읽으니깐 잘 모르겠닭 ㅠ
언젠가 날잡고 쭉 한번 읽어봐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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