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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맑스 [자본] 2권 3편 19장 요약칼 맑스자본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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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권 경제학 비판

제3편 사회적 총자본의 재생산과 유통

제19장 연구대상에 대한 기존의 논의


1절 중농학파

 케네의 경제표는 다른 조건이 불변일 때, 일정 가치의 연간 국민총생산이 유통을 통해 어떻게 배분되어 단순재생산을 반복할 수 있는지를 대략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에서 총생산물 가운데 일부는 원래의 자본가치(동일한 현물형태로 재현된)의 담지자이다. 이 부분은 다시 자본의 기능을 재개하기 위하여 유통되지 않고 그대로 차지농업가 계급 수중에 남아있게 된다. 이 농업 영역에서는 경제적 재생산과정이, 그것의 특수한 사회적 성격과 상관없이, 항상 자연적 재생산과정과 서로 얽혀 있다. 사실 중농학파의 학설은 자본주의적 생산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인 이론이다. 산업자본의 대표자가 경제의 전체 흐름을 주도하고, 농업은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경영된다. 토지의 직접적인 경작자는 임금노동자이다. 생산은 단지 유용한 물품뿐만 아니라 그 가치도 만들어낸다. 생산의 동기는 잉여가치의 획득이며, 이 잉여가치는 유통영역이 아니라 생산영역에서 생긴다. 유통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사회적 재생산과정의 담당자 역할을 맡은 세 계급 가운데 ‘생산적’ 노동의 직접적인 착취자는 잉여가치를 그냥 취득하는 사람들과 구별된다. 중농학파 이론의 자본주의적 성격은, 이미 그 전성기에도, 한편에서는 랭게와 마블리로부터 다른 한편에서는 자유로운 소토지 소유를 옹호하는 사람들로부터 반론을 불러일으켰다.

 재생산과정의 분석에서 애덤 스미스는 케네가 ‘최초의 선대’와 ‘매년 이루어지는 선대’를 각각 ‘고정’자본과 ‘유동’자본으로 일반화해버린 부분과 곳곳에서 중농주의의 오류를 그대로 반복하는 오류를 범한다. 그는 자본=자본가치로 여기고, 자본가치는 ‘고정된’ 형태로 존재하는 것처럼 다루었다. 스미스는 불변가치의 가치가 갱신된 형태로 재현되는 것을, 케네가 정확하게 보았듯 재생산과정의 중요한 계기로 보지 못하고 단지 유동자본과 고정자본의 구별에 관한 설명으로만 사용했다. 그리고 ‘고정자본’과 ‘유동자본’ 개념을 사용하면서 ‘자본’이라는 용어의 개념을 일반화하는 진전을 이룬 반면, ‘고정’과 ‘유동’을 결정적인 구별로 고착화하여 이해하는 퇴보를 보였다.


제2절 애덤 스미스

ㄱ.스미스의 일반적 관점

 스미스는 개별적으로 파악된 모든 상품의 가격은 물론 “각 나라의 토지와 노동의 연간 생산물의 …… 총가격 혹은 총교환가치”까지도 함께 임노동자, 자본가, 토지소유자의 세 가지 수입원천인 임금, 이윤, 지대로 분해한 다음, 우회로를 통해서 제4의 요소인 자본을 몰래 끌어들여야만 했다. 그는 이것을 총수입과 순수입을 구별하는 방식으로 수행하였다. 여기에 대해서 지적하자면

 ①스미스는 축적이 아니라 단순재생산만 다루고 있다. 그는 기능하는 자본의 유지를 위한 지출에 대해서만 말한다. 결국 개인적 생산물과 사회적 생산을 모두의 가치 가운데 일부는 임금, 이윤, 지대로 분해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으로 분해되는 것이다.

 ②스미스는 총소득과 순소득의 구별 때문에 자신의 이론에서 이탈하고 있다. 모든 생산물의 가치는, 개별 자본가든 한 나라 전체에서든, 누군가의 소득을 이루고 그 소득은 자본소득과 ‘수입’을 이룬다. 자본이 수입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미 그 전에 지출되었어야만 한다.

 또한 스미스는 순수입에서는 총고정자본, 유동자본 가운데 고정자본의 유지와 수리 및 갱신에 필요한 부분도 제외되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사실상 소비재원 용도의 현물형태가 아닌 자본은 모두 거기에서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스미스는 생산수단의 생산에 종사하는 노동자들과 직접적인 소비수단의 생산에 종사하는 노동자들 간의 매우 중요한 구별에 직면한다. 전자의 상품생산물 가치는 임금총액에 해당하는 구성 부분을 포함한다. 이 가치 부분은 이들 노동자가 생산한 일정량의 생산수단이라는 물적 형태로 존재하나, 그 생산물은 노동자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도 소비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순수입’만으로 실현되는 사회적 소비재원 부분 속에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스미스는 임금에 대한 이런 설명이 생산수단의 가치 가운데 잉여가치로서 이윤과 지대라는 범주로 산업자본가의 수입을 이루는 구성 부분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덧붙이는데, 이 가치구성 부분도 생산수단 형태로 존재한다. 그것은 화폐화되고 나서야 비로소 두 번째 부문의 노동자들이 생산한 소비수단에서 그 가격에 따라 일정한 양을 획득하여 그 소유자의 개인적 소비재원으로 이전할 수 있다. 그럴 경우 매년 생산되는 생산수단의 가치 중에서 이 생산영역 내에서 기능하는 생산수단 가치에 해당하는 부분은 그것이 취하는 현물형태, 그 자본기능, 수입을 형성하는 어떤 가치구성 부분에서도 절대적으로 제외됨을 스미스는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두 번째 부문의 노동자에 대해 스미스는 노동의 가격과 생산물이 모두 직접적인 소비재원에 들어간다고 하는데, 이는 전혀 정확하지 않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의 ‘가격’이 아니라 그것으로 소비재를 구입함으로써 이 화폐를 실현한다. 스미스의 논의는 이렇게 정리된다.

 ①각 개별 자본가의 고정자본과 그 고정자본의 재생산 및 유지에 필요한 유동자본, 소비수단 생산에 사용되는 그의 유동자본 모두 그의 순수입에서 제외되며, 그의 순수입은 오로지 그의 이윤으로만 이루어진다.

 ②각 개별 자본가의 고정자본과 마찬가지로 그의 유동자본도 사회적 유동자본의 일부를 이룬다.

 ③개별 자본가의 유동자본은 결코 자본가 자신의 수입의 한 부분을 이룰 수 없으나, 사회적 유동자본의 일부분(소비수단으로 이루어지는 부분)은 사회적 수입의 일부를 이룰 수 있다.

 만일 스미스가 그가 고정자본이라고 부른 것의 재생산을 고찰하고, 유동자본이라고 부른 것의 재생산을 고찰하면서 떠올린 단상들을 모두 연결했더라면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을 것이다.

 I.사회의 연간 생산물은 두 부문으로 이루어지며 첫 번째 부문은 생산수단, 두 번재 부문은 소비수단을 포괄하고, 두 부문은 분리해서 다뤄야 한다.

 II.연간 생산물 중에서 생산수단으로 이루어진 부분의 총가치는 생산수단의 생산에 소비된 생산수단의 가치, 노동력에 투하된 자본의 가치, 이 생산영역에 속하는 산업자본가들의 지대를 포함한 이윤의 원천을 이루는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그 중 개별 자본 전체의 고정자본 가운데 재생산되는 부분은 항산 자본으로 기능하며 결코 수입으로 기능하지 않으니, 개별 자본가의 ‘고정자본’은 사회적 고정자본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이것을디 자본으로 기능하는 것은 그 사용자들의 수중에서다.

 III.직접적인 소비수단을 생산하는 자본가들이 소비한 자본은 그 자체로는 앞 부문의 자본가들과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수입을 실현하는 소비재원을 이룬다.

 여기까지의 논의만으로도 사회적 자본은 오직 개별 자본의 합계와 같을 뿐이고 따라서 사회의 연간 상품생산물도 이들 개별 자본의 상품생산물의 합계와 같다는 점, 따라서 모든 개별적인 상품자본들에서 상품가치를 그 구성 부분들로 분해한 것을 사회적 상품자본에 대해서도 적용할 순 있지만 이들 구성 부분이 사회적 재생산의 총과정에서 보여주는 현상형태는 다른 형태라는 점, 생산수단의 재생산에 지출되는 매일매일의 노동은 소비수단 생산에 지출된 불변자본 부분을 보전하는 새로운 생산수단으로 실현된다는 점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 논의들은 축적의 고찰과 관련된 것이라기보다는 단순재생산의 고찰과 관련된 것이다.


ㄴ.스미스에 의한 교환가치의 v+m으로의 분해

 모든 개별 상품의 가격은 세 가지 구성성분으로 이루어진다는 스미스의 도그마는, 결국 상품가치가 v+m(선대된 가변자본가치+잉여가치)과 같다는 것으로 환원할 수 있다. 스미스의 이런 최종적인 결론은 동시에 상품가치의 구성성분에 대한 그의 일면적인 분석의 근원을 보여준다. 이들 구성성분이 생산에 참여하는 각 계급의 수입의 원천을 이룬다는 사실은 그것들의 크기 결정이나 가치총액 규모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여기에는 온갖 착각이 포개져 있다.

 ①노동을 하든 않든 직접 재생산에 종사하지 않는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연간 상품생산물 가운데 자신들의 몫을 일단은 생산물을 처음 할당받는 계급(생산적 노동자, 산업자본가, 토지소유자)의 수중으로부터만 얻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수입은 실질적으로 생산적 노동자의 임금, 이윤, 지대에서 파생되며, 따라서 이들 본원적 수입에 대응하는 파생적 수입으로 나타난다.

 ②결국 상품의 각 가치구성 부분들과 그것들 속에 구체화된 가치생산물의 총액을 정확하게 결정하고 그런 다음 이들 구성 부분들이 그만큼의 다양한 수입원을 이룬다는 것을 논증하는 것에서 시작한 다음 스미스는 정반대로 방향을 틀어 수입을 ‘모든 교환가치의 구성 부분’에서 ‘모든 교환가치의 원천’으로 만들어버린 셈이다.


ㄷ.불변자본 부분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여 스미스가 상품가치에서 자본의 불변가치 부분을 쫓아내버렸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그의 논증은 단지 동일한 주장을 반복할 뿐이다. 예를 들어 그는 곡물의 가격이 v+m뿐만 아니라, 곡물생산에 소비된 생산수단의 가격도 함께 포함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생산수단 그 자체의 가격도 곡물 가격과 마찬가지로 v+m으로 분해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는 이 생산수단의 가격은 그들의 생산에 소비된 생산수단의 가격으로도 분해된다는 점을 덧붙이지 않았다. 연간 노동 총량이 노동력에 투하된 자본가치의 재생산을 위해 필요한 노동과, 잉여가치 창출을 위해 필요한 노동으로 분해된다면, 노동력에 투하되지 않는 자본가치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은 어디에서 생겨나는 것일까? 문제는 다음과 같은 점에 있다.

 ①스미스는 상품의 가치를 임노동자가 노동대상에 부가하는 노동량에 의하여 규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의 본질과 아무 관련이 없다. 노동자는 상품형태로 가치생산물을 만들어내는데, 스미스에 의하면 이 가치생산물의 일부는 그의 임금의 등가이며, 따라서 이 부분의 크기는 그 임금의 가치액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노동자는 이런 범위 이상의 노동을 부가하는데, 그것은 잉여가치를 형성한다. 이 잉여가치가 자본가의 수중에 모두 남아 있을 것인지 아니면 그 일부가 제3자에게 양도될 것인지의 문제는 임노동자가 부가하는 잉여가치의 질적인 성격이나 양적인 크기 어디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것은 생산물의 다른 모든 가치 부분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가치인데, 노동자가 그 등가를 받지 못하고 나중에도 못받으며, 오히려 이 가치가 아무런 등가도 없이 자본가에 의해서 취득된다는 점에서 다른 가치 부분과 구별된다.

 ②개별 산업부문에서 각각의 개별 노동자가 생산한 상품과 관련된 논의는, 모든 산업부분의 연간 총생산물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개별 생산노동자의 하루 동안의 노동과 관련된 논의도 역시 생산노동자 계급 전체가 수행하는 연간 노동에 대해서 똑같이 적용된다. 이 연간 노동은 지출된 연간 노동량에 의해 정해지는 총가치를 연간 생산물 속에 ‘고정시킨다’. 이 총가치는 연간 노동 중에서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연간 임금의 등가를 창출하는 부분에 의해 결정되는 부분과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추가 연간 노동에 의해 결정되는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면 불변자본가치를 위한 여지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스미스는 자신의 저작 서론에서, 상품가치 가운데 수입으로 기능하는 모든 부분이 사회적 소비재원 용도로 정해진 연간 노동생산물과 일치한다고 말한다.

 스미스의 첫 번째 오류는 연간 생산물가치를 연간 가치생산물과 동일시하는 점이다. 후자는 단지 전년도 노동생산물일 뿐이나 전자는 거기에다 연간 생산물의 생산에 소비된 가치요소도 함게 포함한다. 이런 혼동 때문에 스미스는 연간 생산물 가운데 불변가치 부분을 쫓아내버렸다. 게다가 이 혼동은 그가 노동력 지출로 가치를 만드는 노동과 구체적인 유용노동으로 사용가치를 만드는 노동이라는 노동의 이중적 성격을 구별하지 않는 오류에서도 비롯된 것이다. 연간 총생산물은 그해에 지출된 유용노동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연간 생산물가치 가운데 단지 일부분만 그해에 만들어진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이 그 해에 사용된 노동 총량을 타나내는 연간 가치생산물이다. 따라서 스미스는 단지 유용노동의 관점에만 서 있는 것이다.


ㄹ.스미스의 자본과 수입

 각 연간 생산물의 가치 가운데 임금의 등가를 이루는 부분은 자본가가 임금으로 선대한 자본과 같다. 자본가는 선대자본가치의 이 구성 부분을 임노동자가 새로 생산하여 공급한 상품의 가치구성 부분을 통해서 회수한다.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이 가치 부분을 노동자 자신의 생산물인 현물형태 대신 화폐로 지불한다. 따라서 자본가에게는 그의 선대자본차기 가운데 가변적 구성부분이 이제 상품형태로 존재하게 되는 반면, 노동자는 그가 판매한 노동력의 등가를 화폐형태로 받는다. 임노동자의 상품은 단지 그것이 자본가의 자본에 합체되어 자본으로서 기능하는 한에서만 상품으로 기능한다. 다른 한편 자본가가 화폐자본으로 노동력의 구입에 지출하는 자본은 노동자에게 수입으로서 기능한다. 여기에는 스미스가 구별하지 못한 다양한 유통과정과 생산과정이 서로 얽혀있다.

 첫째, 유통과정에 속하는 행위. 노동자는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판매한다. 자본가가 노동력을 구입하는 화폐는, 그의 관점에서는 가치증식을 위해 투하된 화폐이다. 그것은 지출된 것이 아니라 선대된 것이다.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은 단지 모든 상품판매에서 일어나는 것과 똑같은 것일 뿐이다.

 둘째, 생산과정에서는 구입된 노동력이 기능자본의 일부를 이룬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지출함으로써 자신이 생산물로 전화시킨 생산수단에, 자신의 노동력 가치와 같은 크기를 부가한다. 따라서 그는 자본가를 위하여 자본가가 다시 노동력 구입에 ‘선대’할 수 있는 바로 그 자본을 생산한다.

 셋째, 노동자의 노동력의 가치량은 그것이 노동자의 ‘수입’을 이룬다는 사실이나 구매자가 그의 거래물품을 사용하여 구매자를 위한 자본가치를 재생산한다는 사실로부터는 아무 영향을 받지 않는다. 노동력의 가치는 그것의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량에 의해서 결정되며, 이 노동량은 노동자에게 필요한 생활수단을 생산하는 데 소요되는 노동량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임금은 노동자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수입이 된다.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화폐를 받는 것은, 그가 자본가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사용하게 한 다음에야 이루어지며, 자본가는 그것을 지불하기 전에 이미 이 가치를 자신의 수중에 갖고 있다. 따라서 두 번의 기능을 하는 것은 화폐가 아니라 노동력이다. 게다가 노동자는 자신이 받은 화폐를 자신의 노동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지출한다. 따라서 노동력의 끊임없는 구매와 판매는 노동력을 자본의 요소로 영속화한다. 그런 점에서, 스미스가, 노동자 자신이 만들어낸 생산물의 가치 중에서 자본가가 그에게 임금의 등가형태로 지불하는 부분이 노동자에게 수입의 원천이 된다고 말한 부분은 옳으나 상품가치 가운데 이 부분의 성질이나 크기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노동자가 만들어낸 새로운 가치 가운데 그에게 지불되는 몫의 크기가 그의 수입의 크기를 결정하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닌 것이다. 여기에서 스미스를 혼란에 빠뜨린 주범은 ‘수입’이라는 점주다. 그는 상품가치가 수입의 원천이 되는 것이 아니라 수입이 상품가치의 원천이 된다는 오류를 범하고, 따라서 상품가치는 이제 각종 수입으로 ‘합성된’ 것으로 나타난다. 만일 그렇다면 상품가치의 원천이 되는 이들 수입 각각의 가치는 어떻게 결정되는 것인지 의문이 제기된다. 임금은 자신의 상품인 노동력의 가치이며, 이 가치는 그 상품의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잉여가치의 경우 문제가 된다. 스미스에게서 임금과 잉여가치는 상품가치의 구성부분이기도 하다가, 어떨 때는 그것들이 상품가격에서 ‘분해되는’ 요소들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스미스의 설명 가운데 옳은 부분(사회의 연간 상품 생산물에 포함된 가치는 선대된 가변자본의 가치와 가변자본의 가치의 합과 같다는 부분)을 잊지 않고, 또한 스미스가 가치를 만드는 노동과 사용가치를 만드는 노동을 혼동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스미스의 전체적인 생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모든 상품의 가치는 노동의 생산물이다. 따라서 연간 노동생산물의 가치 혹은 연간 사회적 상품생산물의 가치도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모든 노동은 ①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구입하는 데 선대된 자본의 등가를 재생산하는 부분에 해당하는 필요노동시간, ②잉여노동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따라서 모든 상품가치는 단지 이 두 구성 부분으로만 분해될 수 있고, 이것들은 궁극적으로 노동자계급에게는 임금 형태로, 자본가계급에게는 잉여가치 형태로 각자의 수입을 이룬다. 그러나 불변자본가치가 어떻게 해서 새로운 생산물의 가치에 들어가게 되는지는 말할 수 없는데, 단지 이 가치 부분도 궁극적으로 생산수단 그 자체가 노동 생산물이기 때문에 가변자본의 등가와 잉여가치로만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한 가지 옳은 점은, 사회적 자본의 운동에서는 개별 자본을 따로 고찰하는 경우와는 모든 것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후자의 경우 상품가치는 ①어떤 불변의 요소(스미스가 말하는 제4의 요소)와 ②임금 및 잉여가치의 합계로 분해된다. 그러나 사회적 관점에서는 불변자본가치가 사라져버린다.


ㅁ.요약

 잉여가치 획득은 노동력의 구매와 판매를 통해서 시작되긴 하지만 사실상 생산과정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이고 또한 그 생산과정의 본질적인 계기를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 하나의 유통행위를 이루는 예비적 행위(노동력의 구매와 판매)는 그 자신 또한 생산요소의 분배에 기초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잉여가치의 획득이 가치 그 자체의 실체나 가치생산의 성질을 변화시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가치의 실체는 여전히 지출된 노동력일 뿐이며 가치생산도 이런 지출의 과정일 뿐이다.

 상품에서는 생산과정이 보이지 않는다. 그 상품의 생산에 노동력이 지출되었다는 사실은 그 상품이 가치를 지닌다는 물적 속성으로 나타난다. 이 가치의 크기는 지출된 노동의 크기에 의해 측정된다. 그런 점에서 자본가가 생산한 상품은 독립 노동자나 노동자 공동체, 혹은 노예가 생산한 상품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렇지만 우리의 경우엔 노동생산물과 가치 전체가 자본가의 것이다. 다른 모든 생산자와 마찬가지로 자본가도 우선 상품을 판매하여 화폐로 전화시켜야만 생산활동을 계속할 수 있다.

 화폐로 전화되기 전의 상품생산물을 보면, 그것은 모두 자본가의 것이다. 또한 사용가치로서 전적으로 과거 노동과정의 생산물이다. 하지만 그 가치는 그렇지 않은데, 이 가치 가운데 일부는 상품 생산에 지출된 생산수단의 가치가 새로운 형태로 재현될 것일 뿐이다. 새롭게 변한 것은 단지 이 가치의 현상형태일 뿐이다. 상품가치에서 이 부분은 자본가 입장에서는 자신이 선대한 불변자본 가치 가운데 상품생산과정에서 소비된 부분의 등가를 이루는 것이고 이전에는 생산수단 형태로 존재했다. 이제 그것은 새로 생산된 상품가치의 구성 부분으로 존재하며, 이 상품이 판매되면 화폐로 존재하게 되며 다시 생산수단으로 전화되어야 한다. 상품의 두 번째 가치 부분은 임노동자가 자본가에게 판매하는 노동력의 가치이다. 그것은 노동력이 생산과정에 들어가기 전에 노동력의 구매와 판매하는 유통행위 속에서 확정된다. 임노동자는 노동력 지출로 자본가가 자신의 노동력을 사용하는 대가로 지불하는 가치와 같은 크기의 상품가치를 생산하는데, 새로 만들어진 상품가치 속에는 이미 지출된 노동력이라는 잉여가치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 두 가치 부분의 합계가 상품가치 전체를 이루는 것은 아니고, 이 양자를 초과하는 부분이 잉여가치가 남아 있다. 이것을 생산물 전체의 소유자인 자본가가 아무런 비용도 들이지 않은 것이지만 자본가는 이것을 사실상 모두 자신의 수입으로 소비할 수 있다.

 만약 스미스가 상품가치를 고찰하면서 전체 재생산과정에서 상품가치의 각 부분들이 수행하는 역할을 살펴보려고 하였다면, 그는 이들 각 부분이 수입으로 기능하면서 마찬가지로 자본으로 끊임없이 기능할 것이란 것을 알았을 것이다. 스미스는 상품생산 일반을 자본주의적 상품생산과 동일시하여, 생산수단은 처음부터 ‘자본’이며 노동은 처음부터 임노동인 것으로 여긴다. 따라서 상품가치의 분석도 투하자본의 단순한 등가와 잉여가치의 구성에만 치중하는 것이다. 스미스가 문제로 삼는 상품은 처음부터 상품자본이므로 자본주의적 생산과 가치증식 및 가치형성 과정이 먼저 분석되어야만 했다.


제3절 애덤 스미스 이후의 경제학자들

 사실상 리카도는 스미스의 이론을 그대로 수용한다. 스미스와 그가 다른 점은 ①잉여가치의 구성 부분과 관련된 견해에서 그는 지대를 잉여가치의 필수요소로 인정치 않음, ②리카도는 상품가격을 이들 선분으로 쪼갠다는 점이다. 스미스와 다르게, 연간 생산물이 결국 모두 소비될 수 있다는 불합리한 결론을 이끌어낸 사람들은 세이, 매컬럭 등이다. 세이는 총생산물과 순생산물의 구별은 순전히 주관적인 것이며 사회의 수입은 생산된 총가치와 같다고 하는데, 이 견해는 먼저 프루동에게 수용되었다. 슈토르흐는 스미스의 교의는 수용했지만 세이의 응용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한 나라의 자본(불변자본)을 이루는 생산물은 소비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단, 그는 필요가격을 가장 단순한 요소들로 분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시스몽디는 별도로 자본과 수입의 관계를 다루면서 이 관계의 특수한 측면을 파악했지만, 문제의 규명에 조금도 기여하지 못하였다. 바턴, 램지, 셰르뵐리에는 스미스의 견해를 넘어서고자 시도했지만 불변자본가치와 가변자본가치의 구별을 고정자본과 유동자본의 구별에서 명확히 분리하지 못하고 실패했다. 존 스튜어트 밀은 스미스가 그 추종자들에게 물려준 교리를 그대로 재생산한다.

 결론은 스미스의 사상적 혼란은 계속되고 있으며 그의 교의는 경제학의 정통교리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http://ilwar.com/history/251039
자와농 요약글이나 캡쳐프로젝트를 따라 읽다보면 나 자신도 뭔가 막 읽고 있는 것 같고 해서 Kibun이 좋아진닭~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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